최근 컨택트를 다시 한번 봤다. 처음 관람한 이후로 종종 이 영화의 장면들이나 스토리가 떠올랐지만 궁극적으로는 몇 년이 흘러 내 인생의 고난이 겹쳐 오는 최근에 다시 보기를 클릭했다. 그건 이 영화에서 나름의 구원을 찾고 싶어서였다. 시간과 삶에 대한 거시적 관점과 이해가 지금의 미시적인 고통에서 나를 탈출 시켜줄 거라고 믿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에도 같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처음 봤을 때, 영화는 좋았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인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구입할 정도로 좋았다. 당시에 책을 구입한 뒤 영화의 원작이 된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만 뽑아서 재빠르게 읽었는데 그때 당시 소설 자체에는 큰 감명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이미 책에 앞서서 이 영화의 매력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관람하며 처음의 경외감보다는 차분한 이해와 감동이 더 깊어졌기에 소설로 다시 곱씹고 싶어서 책을 다시 보았다. 두 번째의 영화도 소설도 모두 완벽하게 좋았다. 김상욱 교수님의 말처럼 이 영화는 두 번 보아야 더 좋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피어-워프 가설(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인 가설-출처 위키백과)은 여전히 입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지구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 있는 인간 스스로가 검증하는 것은 조금 어불성설인 것 같다. 햅타포드처럼 다른 차원의 생명체와 조우했을 때나 그 가설은 증명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인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자체를 뛰어 넘는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진 존재를 마주했을 때 우리의 사고는 언어를 통해 도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내가 기대고 싶은 구원이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큰 주제이기도 한 시간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다. 가만히 혼자 멍을 때리거나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 있다보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건 혹시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지극히 지구의 인간에게 고정된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어쩌면 빅뱅이라는 것이 일어난 동시에 우주의 종말이 완료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꿈처럼 생각하곤 한다. 우리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라고 느끼는 이 시간이 사실은 영원하게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별다른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하고 개인적인 직관이었다. 하지만 카를로 로벨리라는 학자가 관련된 책을 쓴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그 직관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국문학도로서 주워들었던 언어학적 지식 + 시간에 대한 뇌피셜 지식을 자극하는 주제에 큰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두 번째 봤을 때는 루이스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그 부분에 더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이미 일어날 일을 알고 있음에도, 알면서도 선택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건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얻으며, 어떤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또 어떤 것을 감수하겠는가 하는 선택의 문제였고 그 선택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의 모양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나는 올해로 서른 하나,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며 내가 알고 있는 일련의 연관된, 아니 연쇄된 사건의 연결고리에서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무엇인가를 모르던 시절로,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전의 시절로, 누군가를 만나기 이전으로 가서 안 그럴 수도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나는 안하기를 선택할까?
지금의 따가운 고통을 알고 있는 나는 그럼에도 무엇 하나를 돌이키기는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에게 닥친 불행들은 나에게 다가온 행복과 마치 샴쌍둥이처럼 한몸이다. 내가 지금의 고통 때문에 과거의 선택을 바꾼다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 내 행복과 너무도 긴밀하게 연결된 나의 사랑과도 헤어져야한다. 우리는 만나게 될 수도 없고 평생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채로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니까.
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마치 햅타포드 언어를 터득한 사람처럼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 천천히 이 영화를 마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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